글/ 정윤희 (책문화생태학자, 문화평론가)

정윤희 / 책문화생태학자, 문화평론가. 책문화네트워크 대표, 출판저널 발행인 겸 편집장이다. 언론학 전공으로 언론학 석사, 문화콘텐츠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생태적 글쓰기를 하는 마음', '문화민주주의 실천과 가능성', '책문화생태론' 등이 있다.
정윤희 / 책문화생태학자, 문화평론가. 책문화네트워크 대표, 출판저널 발행인 겸 편집장이다. 언론학 전공으로 언론학 석사, 문화콘텐츠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생태적 글쓰기를 하는 마음', '문화민주주의 실천과 가능성', '책문화생태론' 등이 있다.

AI시대의 독서는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책이라는 물성에 담긴 텍스트를 내 생각과 말, 습관으로 바꾸는 일, 즉 독서를 통한 체화가 핵심이다.

세네카가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non refert, quam multos, sed quam bonos habeas”라고 썼는데, 즉 얼마나 많이가 아니라 얼마나 ‘좋은’ 책을 읽었는지가 독서의 핵심이다. 여기에서 “좋음”은 평판이 아니라 적합성이다. 내 삶의 쟁점과 맞부딪히고 서로 다른 관점이 충돌하며, 시간이 지나도 다시 불러 읽게 만드는 책을 의미한다. 서점들이 제시하는 베스트셀러 목록은 참고일 뿐 선택의 책임은 결국 독자에게 남는다.

느림의 독서가 필요하다. 다양한 쇼츠 영상들이 주의를 초 단위로 쪼개는 시대이다. 느리게 읽는다는 것은 기술이자 결심이다. 한 문단에서 논증의 뼈대를 찾고, 생략된 연결을 추적하고, 낯선 개념을 잠시 멈춰 사전과 다른 책으로 건너가 확인한다.

니체가 자신을 “ein Lehrer des langsamen Lesens”, 즉 “느리게 읽기의 스승”이라 불렀는데, 느림은 곧 사유의 호흡이다. 책장을 빨리 넘길수록 텍스트는 흘러가고, 천천히 씹을수록 문장은 몸에 붙는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책을 쓴 저자의 머리를 빌린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읽기는 남의 머리로 생각하는 일”이므로, 그대로 멈추면 내 생각의 길은 희미해진다. 그래서 중간중간 내 머릿속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책을 읽은 후 내 말로 재서술해 보고, 저자의 주장과 근거를 간단한 도식으로 그려 보면 좋다. 동의하지 않는 지점이 있으면 짧게 반박문을 써보는 것도 추천한다. 이렇게 ‘읽기 → 쓰기 → 적용 → 되읽기’의 작은 순환을 몇 차례만 해보면, ‘아는 것 같은’ 감각은 사라지고 남는 건 내 언어이다.

AI는 이 과정에서 유능한 조수일 수 있다. 그러나 요약과 번역이 원문을 대체하는 순간, 사유는 외주화된다. 그래서 AI시대에서 사유하는 독서가 더 중요하다.

실제로 ‘읽은 권수’는 늘어도 문장이나 개념이 내 일상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 독서는 소비에 가깝다. 반대로 한 권을 오래 붙잡아 핵심 논증을 따라가고, 낯선 개념을 원전까지 확인해 보고, 내 말로 다시 써보는 동안, 텍스트는 지식에서 기술로, 기술에서 태도로 변한다. 그때 비로소 책은 나를 지탱하는 지적 자산이 된다.

이렇게 독서가 체화되는 과정은 개인의 결심과 능력만으로 자라지 않는다. 국가와 지역사회가 함께 설계한 문화기반이 받쳐줘야 한다.

공공도서관은 책을 많이 빌리는 곳에서 ‘더 오래 생각하는 곳’으로 기능을 바꾸어야 한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독후감 대신 ‘세 문장 요약–한 문단 재서술–한 쪽 반박’ 같은 과제로 읽기·쓰기·토론을 촘촘히 엮는 독서교육을 추진해야 한다. 지역서점은 큐레이션과 저자·독자 대화로 선택의 맥락을 넓히는 거점이 될 수 있다.

결국 AI시대 독서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권수가 아니라 밀도이다. 세네카의 말처럼 “선별한 독서는 이롭게 하고(lectio certa prodest)”, 쇼펜하우어의 “남의 머리로 생각하지 말라”, 니체의 “느리게 읽기”가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독서 방법이라고 본다.

AI가 자동 생성한 문장이 아무리 유창해도 마지막에 책임을 지는 문장은 우리가 직접 읽고, 고르고, 다시 쓰며 체화한 문장이다. 사유하는 독서를 통해 사람의 품격과 지역의 문화역량이 함께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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