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윤희 (책문화생태학자, 문화평론가)
진정한 문화강국 부흥을 위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문화적 권리와 경험의 질로 잘 이어지고 있는가, 소수의 성공 서사와 산업 수치로만 소비되고 있는가이다.
문화강국은 승자의 스토리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 접근하고 창작하고 향유할 권리가 사회 전반에 촘촘히 보장된 나라다. 이것이 바로 문화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문화민주주의는 ‘문화예술을 더 많이 즐기게 하자’는 수준을 넘어, 누가 말하고, 누가 기록하고, 누가 대표되는가의 문제를 정치·경제·사회 구조와 함께 묻는 개념이다. 문화가 국가 브랜드의 도구가 아니라 시민권의 내용이 되는 상태, 따라서 문화강국 부흥을 위한 문화정책은 이 지점에서 설계돼야 한다.
유네스코의 2005년이 발표한 ‘문화다양성 보호·증진 협약’은 모든 문화 표현의 동등한 존엄과 국가가 문화정책을 통해 다양성과 참여를 보장할 책무를 갖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2024년 유네스코 정책 브리프는 문화를 ‘글로벌 공공재(global public good)’로 규정하며, 접근·참여·향유·창작의 권리를 통합적으로 보장하는 새로운 문화권리 프레임을 요구하였다. 즉 문화는 선택적 복지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구성 요소라는 선언이다.
현장에서 체감하는 우리의 문화정책은 여전히 산업 지표와 흥행에 치우쳐 있다. 문화예산 배분에서 생활문화·공공도서관·지역서점·소규모 출판과 같은 기반 생태계는 늘 후순위로 밀리고, 거대 플랫폼과 대형 프로젝트, 수도권 중심 기관이 주목을 받는다. 그 결과 문화 참여의 격차는 소득과 지역, 학력, 노동 조건과 결합해 구조화된다.
OECD는 코로나19 이후 문화·여가 서비스 지출이 급감하며 취약계층의 문화 접근이 더 위축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문화 참여가 공동체 신뢰와 웰빙, 민주적 역량에 긍정적 효과를 준다는 근거도 제시했다. 즉 ‘문화’는 위로부터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을 완화하고 사회적 연대를 복원하는 생활 인프라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문화민주주의 관점에서 우리의 과제는 무엇일까.
첫째, 문화권을 기본권으로 재정의하는 입법·정책이 필요하다. 도서관, 기록관, 지역서점, 출판, 미디어, 디지털 플랫폼을 포괄한 ‘문화접근·표현·기록의 권리’를 선언하고, 이를 예산과 제도로 뒷받침해야 한다. 즉 문화권이 보장되어 다양한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지역문화의 공론장’의 실천이 필요하다.
둘째, 시민이 정책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문화도시, 생활문화센터, 다양한 축제 등에서 시민·창작자·독자의 참여를 제도화하지 않는다면, 문화강국은 관료와 기업이 설계한 쇼케이스에 머문다. 유네스코 협약이 ‘시민사회 참여’를 원칙으로 명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문화민주주의는 의사결정 과정의 구조 개편이다.
셋째, 문화생태계 내부의 불평등과 노동 문제를 문화민주주의로 다뤄야 한다. 플랫폼 종속 구조 속에서 창작자와 소규모 출판, 프리랜서 문화노동자들은 여전히 취약하다. 이것을 시장 논리에만 맡긴 채 K-컬처의 성공을 자축하는 것은 모순이다. 문화민주주의는 창작자와 문화노동자가 지속가능하게 일할 수 있는 조건, 즉 공정한 계약, 저작권 보호, 기본소득·사회보장 논의 등을 포함할 때 비로소 실질적인 내용이 된다.
넷째, 디지털 전환 시대의 새로운 공공성을 문화민주주의의 언어로 다시 짜야 한다. 플랫폼 알고리즘이 여론과 취향을 조직하는 시대이다. 이럴 때 공공도서관, 공영미디어 등 공적 플랫폼은 ‘정보 접근권+비판적 리터러시 교육+다양성 보장’을 한 세트로 제공해야 한다. 극단적 혐오와 허위정보가 문화적 상상력을 파괴하는 것을 방치하면서 문화강국을 말할 수는 없다. 디지털 공론장에서의 문화주권, 표현의 자유와 책임, 기록의 공공성은 이제 문화정책의 ‘부록’이 아니라 중심 주제가 되어야 한다.
문화민주주의는 실천으로서 가능하다. 우리가 문화강국의 부흥을 말하고자 한다면, 더 많은 메가 콘서트, 더 큰 페스티벌만을 꿈꿀 것이 아니라, 더 평등한 접근, 더 다양한 목소리, 더 두터운 공공성을 제도화해야 한다.
문화가 소수의 스타를 비추는 무대로만 반짝이고 사라져서는 안 된다. 가령 골목의 작은서점, 동네도서관, 마을축제, 지역출판, 생활예술 동호회에 이르기까지, 서로 연결된 책문화생태계 전체가 숨 쉬며 작동할 때 문화민주주의는 비로소 현실이 된다.
문화민주주의 위에 세운 문화강국. 이는 구조의 문제이고, 주권자의 권리 문제다. 문화정책의 언어를 성장과 수출에서 권리와 참여, 돌봄과 책임의 언어로 전환함으로써, 비로소 문화강국 부흥이라는 말을 부끄럽지 않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