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민주 (도시탐험가)
우리는 때때로 ‘삼일천하(三日天下)’라는 말을 사용하곤 한다. 쿠데타(Coup d'État)를 일으켜 겨우 사흘 동안 정권을 움켜쥐었다가 허무하게 내놓는다는 것. 1884년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일으켰다가 사흘 만에 실패한 갑신정변이 대표적이다.
필자는 서울에 남아 있는 갑신정변의 흔적을 찾아 다녔고, 다섯 차례에 걸쳐 여러 그룹을 이끌고 역사 투어를 진행한 바 있다.
세계 역사에서 여기저기 벌어졌던 삼일천하
자료를 뒤져보면 삼일천하 사례는 심심찮게 나온다. 일본의 경우 임진왜란 발발 10년 전인 1582년에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실권자 오다 노부나가를 죽였으나 11일만에 야마자키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패배하고 만다. 11일 집권이었지만 일본에서는 그냥 “삼일천하(みっかてんか; 밋카텐카)”라 부른다.
가까이는 소련 경우도 있다. 1991년에 소련 군부와 보수파가 쿠데타를 벌여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연금시켰으나 보리스 옐친이 시민들에게 실력 행사를 호소하여 군부는 3일만에 정권을 토해냈다. 그래서 러시아 중심으로 독립국가연합(CES)이 결성되고 공산당 치하 소련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기나긴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에도 삼일천하가 없을 리 없다. 바로 조선 말기 김옥균이 일으켰던 갑신정변이 그랬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쿠데타는 46시간만에 종결되었다. 1884년 12월 4일 오후 9시부터 6일 오후 7시까지였다.
신상옥 감독, 신영균 주연의 1973년 영화 <삼일천하>는 심도 있는 역사 고찰에 긴장감과 재미까지 더했다. 당시 청룡영화상 작품상을 받은 수작이다. 최경식이 쓴 《정변의 역사》는 연개소문 정변부터 시작하여 12.12 쿠데타까지 20개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책은 갑신정변을 ‘금수저 청년들의 삼일천하’로 묘사했다.
개화파, 그중에서도 급진개화파인 김옥균 갑신정변의 핵심인물, 김옥균 이야기를 해보자. 안동 김씨 김옥균은 충청도 공주시 북쪽의 정안면 광정리에서 1851년에 태어났다. 생부인 김병태는 서당 훈장이었다.
김옥균은 어려서부터 천재라는 소문이 나서 당숙인 김병기에게 입양되었다. 양부 김병기가 강릉부사로 부임하면서 김옥균도 율곡의 위패를 모신 강릉의 송담서원에서 공부를 한다. 1866년 한성으로 돌아와 북촌의 양부 집에서 살며 과거 공부도 하면서 인근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두루 사귄다. 특히 북학파 박지원의 손자로 평안도 관찰사와 우의정을 지냈던 박규수를 만나 개화사상에 눈을 뜨게 된다.
김옥균에게 개화사상을 심어놓은 박규수가 누구인가?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는 매우 뛰어났는데, 반남 박씨 박규수를 매우 인정하여 절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효명세자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박규수는 칩거하여 20년 동안 학문을 연마하다가 관직에 진출한다.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며 1866년 대동강으로 무작정 들어온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기도 하였다.
그래도 박규수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1840년, 1856년)으로 중국을 굴복시킨 서구 문명의 위력을 절감하고 있어서 김홍집, 홍영식 등 젊은 관료들에게 개화사상을 힘주어 전파하곤 했다. 김옥균은 바로 근처에 살던 김홍집을 통해 박규수 집의 사랑방에 드나들며 제자가 된다. 더불어 세계 정세를 꿰뚫고 있던 한의사 유홍기(유대치)와 역관 오경석, 그리고 일본에 정통한 봉원사 승려 이동인과도 친해진다. 박규수는 1874년에 우의정까지 이르는데, 개화파의 시조로 추앙 받으면서 당시 젊은 엘리트층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김옥균이 22세이던 1872년에 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한 특별시험인 알성시에서 장원급제를 했다. 고종의 총애를 받아 성균관 전적부터 시작하여 언론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를 모두 거치며 승승장구 했다. 특히 1876년 조선이 일본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나서 박규수, 유홍기, 오경석 등 개화당과의 접촉은 더욱 빈번해졌다.
1877년, 1879년에 박규수, 오경석이 세상을 연달아 뜨면서 백의정승이라 불리던 유홍기, 일본통 이동인과 더욱 밀접하게 접촉했다. 근처에 살던 김홍집, 박영교, 박영효, 김윤식, 유길준, 서광범과 자주 어울려 개화당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 개화당은 시간이 지나며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로 나뉘었는데 김옥균은 박영효, 박영교, 서광범과 함께 급진개화파에 속했다. 급진개화파는 일본을 모델로 하여 왕권이 제한된 입헌군주제를 지지한 반면, 온건개화파는 중국을 모델로 하되 왕권이 여전한 전제군주제를 옹호했다. 물론 급진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나중에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는 온건개화파였다.
일본에 세 차례나 간 김옥균
김옥균은 1881년부터 일본에 연달아 세 번 방문했다. 첫 번째는 1881년 12월 신사유람단으로 어윤중, 홍영식, 유길준, 윤치호, 이동인과 동행했다. 이때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급속한 발전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일본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감화를 받는다. 일본, 중국, 한국이 힘을 합쳐 서구에 대항하자는 유키치의 삼화(三和)주의에도 동감한다.
일본의 영향으로 조선에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만들어지고 나서 구식 군대가 차별을 심하게 받자 불만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이른바 1882년 임오군란이다. 구식 군대는 군인들의 봉급을 책임진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을 부수고 선혜청도 불태워버렸다. 별기군 교관이었던 일본인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도 와중에 피살당한다.
궁녀로 위장해 충주까지 도망간 민비는 중국에게 진압 요청을 해서 마젠종이 이끄는 청군 4,500명이 한양에 들어와 군란을 무력으로 진압한다. 그리고 청군을 위로하려고 찾아온 대원군을 청군은 납치해 톈진으로 송치해 버린다. 내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외국군을 부르면 항상 비극으로 끝난다.
일본은 조선에게 자신들이 입은 피해액을 배상해주고 사죄사를 파견해달라고 요구하여 1882년 8월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를 정사로 하여 김옥균, 서광범이 일본에 간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일본은 이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회유하느라 매우 잘해주어 일본에 대한 김옥균의 호감도는 더욱 올라간다. 고종의 국채위임장을 받아오면 차관을 제공해주겠다는 일본의 제안에 김옥균은 더욱 마음이 부푼다.
이듬해 김옥균은 고종으로부터 국채위임장을 받아 차관을 도입하러 1883년 6월 일본에 세번째로 건너 간다. 하지만 민비파는 고종의 옥새가 찍힌 위임장이 가라는 소문을 내서 김옥균은 차관을 얻는데 결국 실패하고 풀이 죽어 귀국해야만 했다. 김옥균은 화가 나기도 했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조바심도 생겼다.
1884년 12월 4일 밤에 갑신정변 터지다
우리는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서둘러 추진하다가 일을 망쳤다는 말을 많이 한다. 사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대외 정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갑신정변 발발 4개월 전인 1884년 8월 프랑스가 베트남 북부의 종주권을 둘러싸고 청에게 전쟁을 일으켰다. 이른바 청불전쟁이다.
당시 조선에는 청국 군대 3천명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중 절반을 전쟁이 벌어진 중국 남부 해안으로 이동시켰다.
그러자 김옥균은 일본과 합세하여 정변을 일으킬 절호의 기회라 판단했다. 당시 조선에 주재하던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뜻을 같이했고, 광주유수였던 박영효가 몰래 훈련시키던 군사들도 합류하기로 하였다. 물론 개화당의 핵심 멤버들을 비롯해 궁에 있던 환관(유재현), 궁녀(고대수)와도 모의를 했다.
정변을 일으키는 장소를 여러 군데 물색하다가 12월 4일 개축식을 하는 우정총국을 거사 장소로 삼았다. 우정국 총판은 급진개화파 홍영식이었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위치한 조계사 바로 부근에 체신기념관인 우정총국이 아직도 있다. 우정총국 건물이 신축되면서 낙성식 연회에 국내외 인사로 모두 19명이 초대되었다. 우정총판 홍영식의 초대로 내국인으로는 우영사 민영익, 좌영사 이조연, 전영사 한규직, 승지 민병석, 외아독판 김홍집이 참석했다.
그리고 거사를 벌이는 사람으로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가 참석했다. 영어 통역관으로 윤치호가 배석을 했는데 거사의 주도 인물은 아니었다. 외국인으로는 미국 공사 루시어스 푸트, 영국영사 윌리엄 애스턴, 청국 영사 진수당, 청국에서 보낸 외교고문 묄렌도르프, 그리고 일본 서기관 시마무라 히사시가 참석했다. 일본 공사는 거사 준비 때문에 일부러 참석하지 않았다.
근처의 안동별궁에 불이 일자 우정총국에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 나왔는데 그 틈을 타서 일부 인사들이 죽임을 당했고, 민영익은 큰 부상을 입는다. 김옥균 일행은 서둘러 고종이 있던 창덕궁으로 가던 길에 일본공사관에 들러 일본 공사를 일단 만났다.
일본 공사가 우정총국 낙성식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기에 일본군이 거사에 제대로 투입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일본공사관은 갑신정변 마지막 날에 성난 민중들에 의해 전소되었는데, 현재 이 부지에는 천도교 중앙대교당 건물이 세워져 있다.
김옥균 일행은 창덕궁으로 입궐해 고종이 자고 있던 희정당으로 가서 변란이 일어났다며 몸을 피해야 한다며 고종과 민비를 설득해 함께 창덕궁을 빠져 나와 방어하기에 용이한 경우궁으로 이동한다. 지금 현대그룹 사옥이 있는 계동의 경우궁은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의 사당이었다.
고종의 안부를 확인하고자 경우궁으로 오던 전영사 한규직, 좌영사 이조연, 후영사 윤태준 그리고 왕실 척족 세력인 민영목, 민태호, 조영하는 모두 죽임을 당한다. 민태호의 양아들이 우리가 잘 아는 민영환이다. 우영사였던 민영익은 크게 부상을 당했으나 젊은 의료 선교사였던 호러스 알렌의 수술 덕분에 간신히 살아났다. 민영익은 고마움을 표하고자 홍영식의 집터(현재 헌법재판소)에 제중원(광혜원)을 세워 알렌에게 병원 운영을 맡겼다.
거사 이후 김옥균의 바쁜 행보
다음 날인 5일 새벽에 김옥균은 조정의 소식지를 통해 새정부 인사조치를 전격 공표한다. 고종의 사촌형인 이재원을 영의정으로 발표했는데, 고종을 의식한 인사였다. 우정총판 홍영식은 좌의정으로, 흥선대원군의 장남 이재면은 좌찬성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김옥균 자신은 몸을 낮추어 호조참판이라 발표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기획재정부 차관에 해당된다.
인사 발표를 끝내고 김옥균은 고종과 민비를 이재원의 집인 계동궁(현재 현대건설 사옥)으로 옮겼다. 경우궁이 비좁고 춥다는 민비의 불평에 못이겨 김옥균이 마지 못해 옮겨준 것이었다. 하지만 김옥균을 불신하던 민비는 고종과 김옥균을 계속 졸라서 고종과 함께 창덕궁으로 환궁하여 관물헌에 머문다. 창덕궁은 넓어서 청군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훨씬 힘들었다.
사흘째 되던 6일 오전에 김옥균은 혁신 정령 14조를 발표했다. 하지만 그날 오후 들어 위안스카이(원세개)의 지휘 아래 청군 1,500명이 창경궁 동남쪽의 선인문을 통해 창덕궁으로 진입하자 김옥균 일행과 고종은 함께 창덕궁 북쪽으로 몸을 피한다. 김옥균은 인천으로 가자고 권유하지만 고종은 거부하고 궁내 연경당에서 서로 헤어진다. 김옥균 일행 9명은 8일 인천에 도착하여 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 길에 오른다 .
이 배에 동승한 사람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그리고 변수, 이규환, 유혁로, 정난교, 신응희였다. 이중에 서광범, 서재필, 변수, 박영효는 미국으로 갔는데, 철종의 사위로서 금릉위였던 박영효는 격식을 따지느라 미국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일본으로 되돌아왔다.
이것이 삼일천하 갑신정변의 전말이다. 갑신정변의 당시 핵심 멤버 다섯 명의 나이를 보면, 김옥균 34세, 홍영식 30세, 서광범 26세, 박영효 24세, 서재필 21세였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모두 새파랗게 젊다.
갑신정변의 처참한 결과
갑신정변에서 사망자는 얼마나 발생했을까? 김옥균이 남긴 <갑신일록>을 보면 모두 197명이다. 조선인이 제일 많아 149명, 일본인이 38명, 중국인이 10명이었다. 현직에 있던 핵심 관료로는 이조연, 한규직, 윤태준, 민영목, 민태호, 조영하가 세상을 떴다.
정변 가담자로는 홍영식, 박영교(박영효의 형)도 죽임을 당했다. 고종의 환관이었던 유재현은 개화당 간부이기도 했는데 김옥균이 유재현의 배반을 알아차려, 고종의 만류에도 왕 앞에서 그를 죽였다. 고종이 처음에 김옥균 편이었다가 등을 돌린 이유 중 하나로 자신이 아끼던 환관과 신하들을 무자비하게 죽였기 때문이다.
민비의 궁녀로 몸집이 좋았던 고대수는 정변 당시 김옥균 편에서 많은 도움을 주다가 나중에 관군에 잡혀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개화당파의 리더였던 유홍기는 행방불명인데 산으로 몰래 숨었다는 설도 있으나 현장 어디에선가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개화당의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마디로 풍비박산이었다. 김옥균의 양부인 김병기는 갑신정변 당시 형조 참의를 맡고 있다가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삭직(削職)되었다. 그후 수감 중에 사면을 신청했지만 고종에게 거부당해 옥사를 피하지 못했다.
김옥균의 생부인 김병태는 부인 은진 송씨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옥균의 부인인 기계 유씨는 정말 고생을 하면서 살았는데, 딸이 출가를 한 후 병으로 죽었다. 결혼한 딸도 오래 살지 못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네 가지 원인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 5인방은 왜 거사를 망쳤을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나, 네 가지로 압축해보자.
첫째, 준비가 철저하지 못했다. 1884년 8월에 베트남 종주권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청국간에 청불전쟁이 갑자기 터지면서 조선에 주둔하던 청군 절반이 중국 남부로 배치되는 공백을 이용해 김옥균은 거사를 서둘렀다. 청불전쟁이라는 돌발 요인이 없었다면 김옥균이 준비를 더 철저히 했었을 것이다.
둘째, 자체적으로 군사를 키우기는 했으나 충분치 않아 조선에 주둔하던 일본군의 지원에 의존했으나 청군의 움직임이 재빨랐다. 개화당 군대는 충의계 40명, 사관생도 13명, 조선군 친군영 전영군이 1,000명으로 모두 1,050명이었다. 일본공사관에서 김옥균에게 빌려준 호위병은 150명이었다. 한양 일원에 주둔한 청군이 4,000명 있었는데 그중 1,500명이 창덕궁에 진입했다. 숫자상으로 개화당 군대와 일본군의 숫자가 청군에게 밀렸다. 10년 후에 일어난 청일전쟁 때와는 달리 1884년 당시에는 일본이 약했기에 일본은 청국과의 정면대결을 피하려고 했다. 즉 김옥균이 일본군을 너무 믿고 청군의 군사력을 무시했던 것이 거사의 큰 실패 원인이었다.
셋째, 조선 내부로 초점을 맞춘다면, 처음에 고종은 김옥균을 신뢰했으나 민비는 의심을 품었다. 거사 첫날에 김옥균이 민씨를 비롯한 반대파의 핵심 인물들을 제거하고 고종이 신뢰하던 내시감마저 눈 앞에서 죽이자 고종과 민비는 위협을 느껴 김옥균에게 등을 돌렸다. 그래서 민비의 강력한 주장에 밀려 수비에 취약한 창덕궁으로 환궁했다. 더구나 민비는 몰래 연락을 취해 청군의 창덕궁 진입을 촉구했고, 거사가 틀어졌음을 자각한 고종의 입장 변화도 한몫 했다.
넷째, 갑신정변은 민심을 등에 업지 않고 급진개화파의 젊은 엘리트들이 위로부터 주도했다. 주동세력이 30대 일부 그리고 대부분 20대여서 혁명을 낭만적으로 봤다는 것은 사실이다. 당시 김옥균의 나이는 34살, 홍영식은 30살, 다른 세 명은 모두 20대였다. 물론 젊은 상층부만으로도 혁명에 성공하기도 하지만 민심의 폭넓은 지지가 있었다면 그래도 쉬웠을 것이다. 갑신정변이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일본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이다. 10년 후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는 아래로부터의 민중의식이 팽배했었다.
일본에서 김옥균의 잃어버린 10년
일본인들은 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을 일단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느새 김옥균은 문제아 신세가 되었다. 조선이 김옥균을 넘겨달라고 계속 요구했고 일본이 이에 응하지 않자 암살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갑신정변 이듬해인 1885년에 고종은 장은규와 송병준을 자객으로 보내 김옥균 암살을 기도했고, 1886년에는 지운영이 암살을 꾀했다. 송병준은 나중에 대한제국 관료로서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고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백작 작위도 받았다. 지운영은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의 형이자 화가였다.
암살이 국제적 분쟁거리가 되자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도쿄에서 1,000km나 떨어진 태평양의 오가사와라 섬으로 1886년에 유배를 보냈다. 김옥균이 현지의 무더위로 건강에 문제가 생기자 1888년에 홋카이도 삿포로로 옮겨져 훨씬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2년 후에는 아예 유배가 풀려 일본 본토인 혼슈로 돌아온다.
일본에서 유명했던 김옥균은 글씨를 상당히 잘 써서 자신이 쓴 글을 일본인들에게 많이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바둑과 도박에 능숙했던 것도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방탕한 생활로 인해 박영효를 비롯한 동지들로부터 비난을 많이 받았다.
한량 기질이 다분해 동거한 일본 여인들로부터 자식도 낳았다. 정권을 잡기 전의 대원군처럼 자객의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김옥균이 그런 흐트러진 모습을 일부러 보였을 지도 모른다.
김옥균이 혼슈로 돌아오자 조선 정부의 암살 계획이 다시 가동된다. 1892년 이일직이 김옥균과 박영효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아 일본에 입국하고 1893년에 프랑스에서 조선으로 갓 귀국한 홍종우와 접촉을 한다. 암살 작업에 성공하면 조선에 돌아가 크게 뒤를 봐줄 것이라고 김옥균과 나이가 같은 홍종우를 꼬드겼다.
프랑스에 유학을 가서 많은 활동을 했던 개방적인 해외파 지식인이었던 홍종우는 왜 암살에 참여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에 정착하기가 쉬어지리라 판단했다.
당시 홍종우의 아내가 세상을 떴고 자신의 몸도 아팠다. 갑신정변 5인방의 한 사람이었던 홍영식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탄압을 받았기에 고종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김옥균이 추진했던 입헌군주제에 반대하여왕권 중심의 전제군주제를 철썩 같이 믿었다.
김옥균의 마지막 도박
김옥균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의 실력자인 리훙장을 만나겠다며 호기를 부리고중국에 갔을까? 북양대신 리훙장의 양아들인 리진펑은 일본주재 청국 공사로 있으면서 김옥균과 친하게 지냈다. 자신의 후임으로 온 왕펑자오에게 김옥균을 소개하기도 했고, 김옥균에게 친서를 보내 상하이로 초청했다. 친서가 위조되었다는 말도 들었으나, 김옥균은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김옥균은 당시 왜 홍종우와 함께 배를 탔을까? 홍종우가 홍영식의 가까운 친척이 아니더라도 친척이었고, 홍씨 집안이 정변으로 피해를 봤다는 사실에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프랑스에서 오래 체류했기에 원래 프랑스를 조선의 바람직한 모델로 삼았던 김옥균은 프랑스의 최근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어했을 것이다. 또 홍종우가 조선을 떠난 지 좀 되었기에 김옥균은 긴장의 끈을 다소 풀었다. 패착이었다.
1894년 2월 22일 오후 4시 상하이에 있는 여관의 침실에서 김옥균은 세 발의 총알을 맞았을 당시에 북송 사마광의 저서 《자치통감》을 읽고 있었다.
홍종우는 왜 일본이 아니라 중국을 저격 장소로 사용했을까? 김옥균에게 호의적이던 일본 땅에서 김옥균을 죽이면 자신이 안전하게 조선으로 돌아가기가 힘들 것이라 판단했다. 반대로 조선과 친했던 중국에서 죽이면 자신의 귀환은 물론이고 김옥균의 시신을 조선으로 보내 확실한 암살 증거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홍종우는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살해하고 나서 미국 조계지 경찰에게 심문을 당했다. 그는 어떻게 범행 입장을 밝혔을까? 자신은 나라에 죄를 범한 죄인을 징벌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귀찮은 문제를 빨리 처리하고 싶던 중국은 조선의 요구대로 살아있는 홍종우와 죽은 김옥균을 조선에 배로 보냈다. 김옥균의 시신은 양화나루에서 능지처참을 당해 머리가 효수되어 만인들이 보도록 했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홍종우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우리 대부분은 홍종우가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른다. 남양 홍씨 남양군파였던 홍종우는 몰락 양반의 집에서 1854년 경기도 안산에서 태어났다. 당시 개화 움직임을 감지하고 1883년 김옥균이 사절로서 일본 오사카에 갈 때 따라가기도 했다. 두 사람의 최초 만남이었다. 1887년에 프랑스와 조불수호통상조약이 비준되자 이듬해 일본을 거쳐 1890년에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에 간다. 홍종우는 1890년에 여권을 위조해 프랑스에 입국했다고 한다.
홍종우는 프랑스어를 구사하지는 못했지만 일본어 통역관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였다. 항상 한복을 입고 다니면서 프랑스의 유력 인물들을 만나곤 했다. 그는 1890년부터 1893년까지 2년 6개월 간 프랑스에 체류했다.
홍종우는 파리의 기메미술관에서 근무하면서 1892년에 《춘향전》을 번안하여 프랑스어로 《향기로운 봄Printemps Parfumé》을 출간했다. 《심청전》을 번안한 《다시 꽃이 핀 마른 나무》도 그가 프랑스를 떠나고 1895년에 책으로 나왔다.
홍종우는 조선으로 돌아와 고종의 측근이 되어 여러 관직을 맡다가 1903년 제주목사로 마지막 관직을 보내고 10년 후 세상을 떴다.
우리는 홍종우 하면 단지 김옥균의 암살범으로만 기억하지만 생각이 많았던 인물이다. 정명섭이 홍종우에 대한 책을 두 권 냈다.
만약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이 실패로 돌아갔다면
당시의 지식인 유길준은 일본에 있던 김옥균의 묘를 찾아가 아래와 같은 비명을 남겼다.
“ 비상한 재주를 갖고,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도 세우지 못하고,
비상하게 죽어간,
하늘나라의 김옥균공이여.”
정말 맞는 평가다. 글재주가 좋았던 김옥균은 사람 만나기를 좋아해 조선과 일본에 에피소드를 정말 많이 남겼다. 정변을 섣불리 일으켰으나 일본의 배반과 민중의 낮은 지지로 인해 정변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10년간 일본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었으나 호기를 부려 중국에 건너갔다가 믿었던 지인에게 허무하게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다.
암살 후 5개월이 지나 풍도 해전을 기점으로 청일전쟁에서 벌어지고 일본이 승기를 잡자 갑오개혁이 이루어졌다. 만약 김옥균이 몇 개월더 살았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역사의 물꼬를 돌리는 큰 기회가 생겼을 지 누가 알겠는가?
참고하면 도움이 될 책
갑신정변에 대한 책으로는 박은숙의 저서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와 《갑신정변 연구》 두 권이 제일 좋다고 평가하고 싶다. 갑신정변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잃어버린 혁명: 갑신정변 연구》,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조선 엘리트 파워 김옥균과 젊은 그들의 모험》도 좋다.
만화로 재미있게 읽고 싶다면 《개화당 삼일천하와 김옥균》, 《혼돈의 시대가 낳은 풍운아 김옥균》, 《왜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을까?》을 추천한다.
조선 말기의 개화파 인물 전반에 대해 알고 싶다면《개화파에서 김가진까지 개화파 열전》을 추천한다. 또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일어났던 정변을 다양하게 알려고 하면 《정변의 역사》도 도움이 된다.
김옥균이 거사에 실패하고 일본에 가서 1885년에 남긴 《갑신일록》이 있다. 이 책자는 갑신정변에 대한 1차 자료인데, 일본인들에 의해 조작된 위서라는 지적도 있기는 하다. 강준만이 쓴 《한국 근대사 산책》 시리즈의 1권을 보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둘러싼 설명을 볼 수 있다.
갑신정변과 김옥균에 대한 책은 많았는데 암살범 홍종우에 대한 책은 그동안 별로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 정명섭이 두 권을 썼다. 하나는 팩트에 기반을 두어 두 사람을 대비해 썼고, 다른 하나는 픽션을 집어 넣어 역사소설로 썼다. 전자에 해당되는 책은 《그래서 나는 조선을 버렸다: 정답이 없는 시대, 홍종우와 김옥균이 꿈꾼 다른 나라》이고, 후자에 해당되는 책은 《김옥균을 죽여라: 암살범 홍종우가 밝히는 김옥균 피살사건의 진실》이다. 이처럼 홍종우 입장에서 보면 세상이 매우 달리 보인다.
갑신정변 영화로는 신상옥 감독의 1973년 영화 <삼일천하>가 매우 좋다. 1973년 청룡영화제 작품상을 수상한 수작으로 신영균이 김옥균 역할을 했다. 그리고 임원식, 나봉한 감독의 1965년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도 있다. 유주현의 대하역사소설 <대원군>을 원작으로 하여 신상옥 감독이 만든 1968년 영화 <대원군>도 당시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3부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