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민주 (리드앤리더 대표, 도시탐험가)
2022년 5월 청와대가 전격 개방되었다. 이전에는 TV 뉴스에서 청와대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으나, 이제는 온라인으로 간단히 예약만 하면 청와대에 들어갈 수 있다. 더구나 65세 이상이면 청와대 입구에서 주민증만 보여주면 입장이 가능하다.
개방 초기에는 사람들이 쇄도하여 관람하기 힘들었지만 1년 반이 지난 지금(이 글을 쓴 시점은 2023년 10월임), 청와대 공간은 다소 진정되어 차분하게 구경하기에 좋아졌다. 하지만 아직도 지방에서 전세 버스를 타고 단체로 구경 오는 사람들은 여전하다.
권력핵심 공간에서 문화관광 공간으로
북악산 바로 아래 청와대는 우리에게 어떤 공간이었을까? 철옹성? 아방궁? 비밀의 공간? 금단의 땅? BH(Blue House)? 아주 간단히 말하면 권력핵심 공간이었다. 선출된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들이 번갈아 가며 그곳에 살며 일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용산 둔지산 아래에 대통령실이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와대가 대통령실이었다. 우리는 대통령 동향을 전달하는 TV 뉴스로 청와대의 편린만 훔쳐보았을 뿐이다. 대통령에 따라 경내를 개방한 경우도 있었지만 일시적이었다. 가깝고도 먼 공간이었고, 익숙하고도 생소한 공간이었다. 현재 청와대의 주소는 ‘종로구 청와대로 1’로 매우 간단하다.
필자가 청와대와 관련된 이런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지면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질문을 내보자.
질문 1 : 청와대의 전 이름은 경무대로, 경복궁과 신무대의 합성어다. 경무대와 청와대라는 말을 누가 처음 사용했을까?
1) 이승만, 박정희 2) 조선총독, 박정희 3) 고종, 윤보선 4) 이승만, 윤보선
질문 2 : 청와대 구 본관은 대통령의 생활공간이자 집무공간이었으나, 본관과 관저가 새로 지어지면서 분리되었다. 새로운 건물에는 어느 대통령이 첫 입주하였는가?
1) 전두환 2) 노태우 3) 김영삼 4) 김대중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정답은 3),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정답은 2)다. 아래 글을 읽다 보면 설명이 자연스럽게 스며나온다.
고려, 조선시대의 청와대 터
우선, 청와대가 자리잡은 터가 어떤 곳인지 살펴보자. 고려의 수도는 개경이었다. 태조는 서북쪽의 평양을 서경으로 삼았고, 성종은 987년에 동남쪽의 경주를 동경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1067년 문종이 개경에서 가까운 양주 한양을 남경으로 정했고 문종의 아들인 숙종은 1103년 남경으로 천도할 생각에 행궁까지 지었다. 이 행궁은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과 태원전 일대이니, 청와대 정문 바로 앞이다. 이후 몽골의 침입과 지배로 천도 계획은 수그러들었다가 개경의 천운이 다했다고 느껴 고려 말기의 공민왕, 우왕, 공양왕은 남경에 자주 순행하였다. 하지만 천도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이 들어서며 태조는 고려 왕실을 따르는 구세력을 척결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도모하려고 새로운 수도로 천도할 계획을 세웠다.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에 근거해 수도 후보로 계룡산, 무악 등 여러 곳이 거론되다가 마침내 한양으로 낙착되었다.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내사산(內四山)으로 정해 이 산들을 둘러싸고 한양도성이 건설된 것이다. 사직과 종묘의 입지가 정해지고 그 중간에 경복궁이 법궁으로 정해졌다. 조선 초기에 태종은 이 남경 터에 회맹단을 설치했는데, 회맹단은 임금이 신하들로부터 충성서약을 받는 자리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해서 불안했던 태종은 여기서 회맹을 다섯 차례나 치렀다. 회맹단은 권위의 공간이라 세종에서 선조까지 임금들은 북악산 일대에서 돌도 캘 수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이 불에 타자 조선 왕들은 창덕궁에서 정사를 돌봤는데 고종은 경복궁을 대거 중건하며 법궁으로 다시 삼았다. 경복궁에 전각들이 많이 들어서자
들어서자 공간이 비좁아지면서 신무문 북쪽에 후원을 만들었는데 이곳을 경무대(景武臺)라 불렀다. 경복궁과 신무문에서 이름을 한 자씩 따온 것이다.
경복궁 동쪽에는 너른 평지가 있어 병사들이 훈련을 하고 갖가지 행사도 열었는데 지금의 녹지원과 헬기장 일대다. 평지 동쪽에 융문당이, 북쪽에 융무당이 있었다 문(文)을 상징하는 융문당에서는 과거 시험을 치르고, 무(武)를 상징하는 융무당에서는 군사 훈련을 했다. 지금의 관저 일대에는 오운각, 옥련정, 침류각이 있었다. 등성이 서쪽 즉, 영빈관 부근에는 경농재가, 그 앞에는 임금이 직접 농사를 살피는 내농포가 있었다.
청와대 구 본관과 신 본관
이때만 하더라도 청와대 일대는 경복궁의 일부라고 할 수 있었는데, 1939년 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가 그곳에 총독 관저를 지으면서 경복궁에서 떨어져 나왔다. 관저 지붕은 증산교 계통인 보천교 본당의 푸른색 기와를 가져다 덮었으니 이때부터 청와대였던 셈이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사령관 존 하지(John R. Hodge) 중장이 이 집에 거주했다.
4.19혁명 이후 대통령이 된 윤보선은 독재 이미지로 가득 찬 경무대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을 택하고자 했다. 화령대와 청와대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화령은 이성계의 고향인 함경도 영흥의 옛 이름으로 조선을 개국하며 명나라에서 요청한 두 가지 국호 중 하나였다. 당시 명나라는 화령 대신 조선을 찍었다. 물론 청와대는 미국의 백악관에 대응되는 단어였다. 백악관(White House)이라는 명칭은 그전에도 사용되기는 했으나 1900년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때 공식 명칭이 되었다. 1960년 8월 윤보선은 이곳에 입주하면서 청와대에 낙점을 찍었다. 1961년에 윤보선 대통령이 큰 바위에 청와대라고 직접 글씨를 썼다고 하는데 1991년에 청와대 본관을 새로 지으면서 사라졌다.
박정희 정부 들어 청와대 이름이 바뀔 뻔했다. 황와대(黃瓦臺)로 이름을 바꾸자는 아부성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황금빛은 자금성 전각 지붕처럼 황제를 상징하는 색이었기 때문인데 박정희는 이를 거부했다. 단 ‘Blue House’로 사용하던 영어 명칭은 ‘Cheong Wa Dae’로 바뀌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청와대를 ‘BH’라 간단히 불렀다.
이승만, 윤보선에 이어 박정희 시기에 청와대는 일반인에게 잠시 개방되기도 했다. 하지만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위시한 북한 무장공비가 들이닥치면서 청와대는 금단의 땅이 되기 시작했다. 전두환 시기에 청와대는 잠시 열리기도 했으나 1983년 미얀마에서 아웅산 사고가 터진 이후 청와대는 다시 빗장을 걸었다. 노태우 시기에 들어와 다시 열리긴 했다. 이처럼 누가 대통령인지, 당시 어떤 사고가 터졌는지에 따라 청와대 정문은 열리고 닫혔다.
1991년에 청와대 본관과 관저를 새로 지었는데 지붕은 여전히 청기와로 유지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에 집권하자마자 구 본관을 허물어버렸고, 중앙청이라 불리던 조선총독부 건물도 1995년에 과감하게 철거해 버렸다.
청와대를 이전하려던 역대 정부의 잦은 시도
김영삼 대통령부터 시작해 역대 대통령들은 구중궁궐이자 독재자가 칩거하던 청와대에서 벗어나 국민과 소통하기에 적절한 다른 곳, 예를 들면 광화문청사를 대통령 집무실로 정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통행이 많은 지역으로 가면 대통령을 경호하기가 어렵고 이전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통령만 거처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비서실, 경호실을 비롯해 많은 직원들의 연쇄 이동이 불가피하다.
김영삼 대통령은 유세 당시에 광화문청사에서 집무하겠다고 공약했으나 1993년에 취임하면서 이 공약을 포기했고, 1998년 김대중 대통령도 광화문청사와 과천 제2청사에 집무실을 마련하려다 포기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아예 수도를 충청도로 옮기려고 했는데 2004년 헌법재판소는 수도 이전을 위헌이라 판결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청사 별관에 집무실을 마련하려고 했으나 불발에 그쳤다. 문재인 대통령도 노력했으나 결국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아예 청와대에 발을 딛지도 않고 용산의 국방부 청사에 대통령실을 전격 마련했다. 나중에 청와대로 다시 회귀할 지도 모르지만 30년에 걸친 대통령실 이전 논란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청와대의 역사>
고려 숙종 때 현재 청와대 자리에 남경 행궁 지음
조선 고종 때 경무대라 이름 지음
1939년 조선총독 관저 건립
1945년 미군정청 장관 관저 설치
1960년 경무대 이름을 청와대로 바꿈
1968년 1.21사태로 청와대 인근 통제
1991년 청와대 본관 준공
1993년 구 본관 철거
2022년 청와대 완전 개방
청와대 투어를 휘리릭 해보기
- 영빈관, 본관, 수궁터, 그리고 관저
이제 청와대가 전면 개방되었으니 청와대 경내를 자세히 둘러보자.
정문으로 들어오면 양편에 여러 건물들이 있는데 경호실 건물이었다. 더 들어와 왼편으로 빠지면 1978년에 세워진 영빈관이 나온다. 대규모 회의나 외국 국빈이 방한했을 때 공식행사를 개최하던 곳으로 1층은 대접견실, 2층은 대규모 오찬 및 만찬 행사 장소다. 영빈관이라고는 하나 숙박할 수는 없다. 청와대 개방 이후에도 영빈관에서 정부 행사가 때때로 열리곤 하는데 이 때에는 일반인이 구경할 수 없다. 영빈관 앞뜰의 팔도배미는 왕이 몸소 농경을 체험하는 공간이었다.
대정원을 지나면 묵직한 청와대 본관이 나온다. 여기가 청와대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본관은 노태우 대통령 시기에 완공되었는데 노태우 정부의 초대 문화부 장관(1990~1991년)이었던 이어령이 본관을 설계하는 데에 기여를 했다. 이 본관을 짓는데 청기와가 무려 15만 개나 들었다고 한다. 본관 1층에서는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를 비롯해 여러 전시물을 볼 수 있다. 화가가 대통령 실물을 보고 초상화를 그렸지만 박근혜 대통령만 사진을 보고 그렸는데 탄핵을 받은 후 복귀하지 못하고 그만 파면되었기 때문이었다. 계단에 깔린 빨간 카펫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가면 대통령 집무실을 볼 수 있다. 본관의 서쪽 윙(wing) 세종홀은 국무회의 공간으로, 동쪽 윙 충무홀은 대통령이 임명장을 수여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본관에서 나와 구 본관 자리였던 수궁 터로 가보자. 이곳을 수궁(守宮)이라 부르는 이유는 조선시대에 왕궁을 지키는 군사들을 위한 건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복궁에 전각이 연달아 세워져 비좁아지자 고종은 여기에 후원을 만들어 경무대(景武臺)라 이름 붙였다. 이 공간에는 일제강점기였던 1939년에 조선총독 관저가 들어섰고 미 군정기에는 미군정사령관 관저로도 사용되어 존 하지 중장이 거주한 바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서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에서 집무를 시작했다. 1층은 대통령 집무실, 2층은 살림집이었으니 대통령이 재택근무를 한 셈이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나자 윤보선 대통령이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건물 이름을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바꾸었다. 전두환 대통령 시기에 이 건물이 리모델링 되기도 했으나 노태우 대통령 시기였던 1991년에 본관이 따로 지어지면서 이 건물(구 본관)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했던 1993년에 철거되었다. 현재 이곳은 ‘청와대 구 본관 터’라 불린다. 수궁 터에는 줄기가 붉은 주목(朱木)이 있는데 수령이 750년으로 추정된다. 주목은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연, 썩어서 천년, 합해서 삼천연을 간다’고 말할 정도로 생명력이 끈질기다. 주목, 반송, 회화나무, 구상나무 등 청와대에 심겨 있는 나무들만 해설한 책으로 박상진이 쓴 《청와대의 나무들》이 있다.
대통령의 사적 공간인 관저는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관저는 1990년에 완공되었는데 관저 입구에는 인수문(仁壽門)이라는 정문이 있다.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가 터진 날 오전에 박근혜 대통령은 근무 시간이지만 본관의 집무실로 나오지 않고 이 관저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문제가 되었다. 관저에서 본관까지는 보통 걸음으로 10분 남짓 걸린다. 지금 가면 관저 주위를 360도 둘러볼 수는 있지만 내부 관람을 할 수는 없다.
관저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북악산의 막다른 산기슭에 오운정과 석조여래좌상이 있고,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각자도 보인다. 오래 전부터 청와대 일대가 제일가는 명당, 길지였음을 알 수 있다. 청와대에 남아있는 유일한 정자인 오운정은 원래 관저 자리에 있었는데 관저 신축 과정에서 현재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관저 뒤편에는 옥련정 정자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다. 원래 경주 남산에 있던 석조여래좌상은 일제강점기에 남산 왜성대를 거쳐 조선총독 관저가 지어질 때 이곳까지 왔다.
- 관저에서 내려오면
관저에서 내려오면 왼편에 침류각이 보인다. 1905년 관저 자리에 세워졌다가 1989년 대통령 관저가 신축되면서 현재 자리로 이전되었다. 침류(枕流)는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는 뜻으로 느긋하게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좀 더 내려오면 상춘재가 보인다. 상춘실은 원래 조선총독 관사의 별관으로 당시 이름은 매화실이었다. 1978년 상춘실을 헐고 그 자리에 슬레이트 지붕의 목조 건물을 지어 상춘재라 불렀다. 1983년에 외국 손님에게 전통 한옥을 소개하며 의전 행사를 할 목적으로 목조 건물을 새로 지었다. 외빈을 접견하거나 여야 당대표나 기업인들을 초대해 만나는 공간으로 사용되곤 했다. 2022년 3월 28일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당선인 간에 만찬이 이곳에서 열렸다.
상춘재 바로 아래에 녹지원이 펼쳐져 있다. 오래된 큰 나무들도 있고 잔디도 넓게 깔려 있는데 역대 대통령들이 기념식수를 많이 하였다. 어린이, 어르신, 장애인 초청 행사나 열린음악회 등 국민을 초청하는 행사를 여기에서 많이 치렀다. 본관 앞의 대정원이 국가 귀빈을 맞는 행사에 쓰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녹지원 자리는 조선시대에 문.무의 과거를 보던 곳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총독 관사의 정원으로 가축사육장과 온실로 사용되었다. 상춘재 동쪽의 녹색 건물은 수영장으로 사용되었다.
녹지원 아래에는 대통령 비서실 직원들이 근무하던 여민관 세 동이 자리잡고 있다. 여민1관에는 대통령이 비서들과 함께 일하는 집무실이 있었다. 여민1관에는 비서실장실과 정무수석실, 여민2관에는 민정수석실, 여민3관에는 홍보수석실이 있었다. 국민과 함께한다는 의미로 노무현 대통령이 비서실동을 여민관(與民館)이라 이름 지었는데 이명박 대통령 때 위민관으로 바뀌었다가 문재인 대통령 때 여민관으로 돌아왔다. 대통령에 따라 업무 공간이 확연하게 달랐다. 예를 들면 이명박 대통령은 본관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관저에서 주로 업무를 봤으나, 문재인 대통령은 여민1관 3층에서 일을 처리했다.
춘추관은 청와대의 기자회견장과 출입기자실로 사용된다. 여러 미디어의 기자들이 일하던 곳으로 우리가 TV에서 많이 본 공간이라 익숙하다. 대통령실이 기자들에게 대통령과 정부 관련 최신 뉴스거리를 전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1990년에 신축된 춘추관 건물은 예산 수덕사의 대웅전을 본 땄다. ‘춘추(春秋)’는 공자가 쓴 역사 책으로 ‘엄정하고 비판적인 태도로 보도, 홍보하여 공정하고 진실된 역사를 남길 곳’이라는 뜻을 지녔다.
효자로 따라 청와대 근처 둘러보기
청와대 정문을 통해 들어가기 전에 청와대 주위를 둘러보는 것도 좋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청와대 정문으로 가려면 3호선 경복궁역을 이용하면 좋다. 경복궁역 4번 출구로 나와 효자로를 따라 북쪽으로 계속 걷으면 된다. 서촌의 동편에 위치한 효자로에는 볼 것이 여기저기 숨어있다. 동 관점에서 보면 적선동부터 시작해 통의동, 창성동, 효자동이 연달아 나온다. 효자로는 900m에 불과하지만 동이 이렇게 많은 것은 예전의 동 규모가 작았음을 방증한다. 효자동을 지나면 궁정동, 청운동이 이어진다.
- 적선동, 통의동, 창성동
효자로를 유적과 건물 관점에서 본다면, 김정희 본가 터부터 시작해 금융감독원연수원 -> 대림미술관 -> 창의궁 터 -> 통의동 마을마당 -> 보안여관 -> 정부서울청사 창성동별관 -> 진명여고 터 -> 춘원이광수 집터 -> 해공신익희 가옥 -> 청와대 사랑채 -> 효자동삼거리가 연달아 전개된다.
사직로와 효자로가 만나는 곳에 김정희 본가 터 표석이 놓여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동양척식회사 사택이 이곳에 있었다. 효자로 따라 약간 가면 나오는 통의동에는 금융감독원연수원이 있다. 여기에 2022년에 윤석열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설치된 바 있다. 현재 다모여빌딩에는 과거에 코오롱패션산업연구원이 있었다. 대림미술관에서는 여러 전시가 열리는데, 미술관 뒤 문화공간 브릭웰의 내부에는 전시공간 그라운드 시소(ground seesaw)가 있다.
창의궁은 영조가 즉위하기 전에 연잉군으로 살았던 잠저였다. 영추문 앞에는 통의동 마을마당이 있는데, 과거에는 청와대의 안가(안전가옥)였다. 한때 개인 소유로 바뀌었으나 건축가와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바로 뒤편에 아트스페이스3 갤러리의 지하에는 조선시대 집터 유구가 보존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허술하게 지어진 보안여관은 지방에서 출장 온 공무원들의 단골 숙박장소로 인기를 끌었다. 보안여관 옆에는 한때 대한국적십자병원이 자리를 잡았었다.
정부서울청사 창성동별관은 예전에도 있었지만 현재 신축 중으로 2024년 12월에 완공 예정이다. 초창기의 국민대학교가 1948년부터 정릉으로 이전하던 1971년까지 여기에 자리잡았다. 1946년에 발족된 학교 설립준비위원회에는 해공 신익희 회장, 조소앙 명예회장, 김구 고문, 김규식 고문이 참가했다. 설립준비 인물이 모두 임시정부 출신이라 국립대학교를 한때 추진했으나 불발했다. 국민대학교 이전에는 이 자리에 체신학교가 있었다.
창성동별관을 바로 지나면 창성동37번지가 나오는데 바로 진명여고 터다. 고종의 후궁이었던 순헌황귀비가 창성위궁 1,300평을 하사해 1906년에 세운 진명여학교로 1989년에 목동으로 이전되었다. 이 학교 출신으로는 화가 나혜석, 시인 노천명, 연극배우 박정자, 판사 황윤석, 뉴스앵커 신은경이 있다. 1958년 교내에 지어진 삼일당이라는 강당에서는 외부 행사도 많이 열렸다. 진명여고 후면에는 쌍홍문 터가 있는데 근처 2층 양옥집은 이광수 부부가 살던 집이다. 국내 최초의 산부인과 여의사였던 허영숙은 건물 1층에 산부인과 병원을 열었고, 2층 살림집에서는 남편 이광수와 함께 살았다. 바로 부근에는 해공신익희의 오래된 가옥도 있다.
- 효자동, 궁정동과 무궁화동산, 칠궁
창성동을 지나면 효자동이다. 조선 시대 경복궁으로 출퇴근하는 내시들이 이곳에 많이 살아 고자동이라 불리기도 했다. 청와대가 개방되기 전만 하더라도 청와대 홍보관이었던 사랑채는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제 누구나 쉽게 청와대를 구경할 수 있으니 사랑채 인기는 급락했다. 전시물이 훨씬 줄어들었으나, 예전 분위기를 느껴보려면 한번 둘러봐도 좋다.
효자동삼거리에 위치한 분수대는 1968년까지 전차가 서울 곳곳으로 운행되었을 때 숭례문~효자동 노선의 종점 자리였다. 여기에서 1960년 4.19 혁명 당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최초로 발포하면서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당했다. 역삼각형 모양의 표석도 길가에 놓여 있는데 국가폭력에 대항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송강호가 주연을 맡은 2004년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 나오는 실제 이발소는 전차 종점 왼쪽에 있었다. 1985년에 설치된 청와대 분수대에서 지구의에 서 있는 봉황은 대통령을 상징한다.
무궁화동산에 오면 불현듯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에게 박정희 대통령 피살’이 생각나곤 한다. 무궁화동산이 넓지는 않지만 사고 현장이 과연 어디일까 궁금하지 않을까? 궁정동과 삼청동에는 안전가옥을 의미하는 안가(安家) 12채가 있었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에 이 가옥들을 모두 허물고 동산을 조성해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무궁화동산과 칠궁이 있는 곳은 궁정동이다. 궁정동은 숙빈최씨 신위가 있는 육상궁과 더운 김이 나는 우물이 난다는 온정동의 합성어다. 무궁화동산에서 칠궁 앞을 지나 창의문으로 가는 창의문로는 원래 없던 길인데 1968년 1.21 사태가 발생한 후 청와대 경호 목적으로 새로 낸 길이다.
동산 바로 근처에는 칠궁(七宮)이 있다. 왕을 낳기는 했지만 왕비에 오르지 못한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인 육상궁이 처음 만들어지고 일제에 의해 1908년과 1927년에 다른 여섯 후궁들의 신위가 더 들어오게 되었다. 저경궁, 대빈궁, 연우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은 원래 한양도성 내 여러 군데 있었는데 일제가 그 궁 자리를 사용하기 위해 여기 칠궁으로 모두 이전해 버렸다. 칠궁 북쪽의 백악산 기슭에는 대은암이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여기에서 대은암천이 시작된다. 이 천은 칠궁 내 냉천을 지나 경복궁의 금천이 되고 삼청동천에 합류된다. 삼청동천은 청계천으로 합류된다. 칠궁에서는 청와대 내 영빈관이 보이는데 칠궁 관람을 마치고 청와대 정문을 통해 입장을 하면 된다.
청와대 동쪽의 춘추문을 통해 청와대에서 나오면 바로 삼청동으로 연결된다. 삼청동에는 국무총리가 근무하고 거주하는 국무총리 서울공관이 자리잡고 있다. 근처에는 외무부장관 공관과 헌법재판소장 공관도 있다. 삼청동에는 맛있는 맛집과 카페들이 많이 있으니 투어를 마치고 맛있는 점심을 들기에 아주 좋다.
청와대를 다룬 여러 책
청와대에 관한 책은 많이 출간됐다. 크게 보면 이렇게 구분되지 않을까?
우선, 2022년 청와대 개방 이후에 나온 책들이 있다. 청와대의 역사를 포함해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고, 청와대의 내밀한 공간들을 속속들이 보여준다. 예전에는 이렇게 자세히 말해줄 수 없었는데 이제는 전면 개방되었으니 속살을 보여주는 것이 가능하다. 안충기가 쓴 《처음 만나는 청와대》가 대표적이다. 역사 관점에서 청와대를 훑어본 책으로는 서울역사편찬원에서 펴낸 《청와대, 파란기와집 역사 이야기》가 있고, 건축과 그림 관점에서는 백승렬이 쓴 《청와대의 모든 것: 청와대 안 건축과 그림과 문화의 아름다움에 빠지다》도 있다.
청와대 개방 이전에 나온 책들은 많지만 어린이 독자를 위해 백승렬이《(나랏일을 돌보며 국민을 섬기는 곳) 청와대(개정2판)》를 출간했다. 핵심 위주로 정리했는데 출간 시점이 청와대 개방 이전이라 청와대의 모든 공간을 소개하지는 못했다. 청와대 경호실이 이색적으로 청와대를 정밀 분석한 책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유산》을 2007년에 출간한 바 있다. 청와대 내부는 물론이고 청와대를 중심으로 북쪽 지역, 서쪽 지역, 동쪽 지역, 경복궁 지역으로 나누어 인근 지역도 자세히 소개했다. 판형도 크고 총 494페이지로 상당히 두껍다.
역대 여러 대통령들은 청와대를 이전하려고 했으나 성사시키지 못했다. 청와대가 깊숙한 구중궁궐(九重宮闕)이라 국민과 유리되어 있어 국민과 가까이 접하는 곳으로 가려고 했으나, 보안 문제로 공간 확보가 어려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전 이유에는 청와대의 풍수가 좋지 않다는 사실도 당연히 한 몫 했다. 최세창의 《청와대 풍수논쟁》에는 자세한 풍수지리 내용이 들어가 있다. 무학대사의 인왕주산설과 정도전의 백악주산설의 대립부터 시작해 뼈가 드러난 백악산과 화기가 넘치는 관악산 등 풍수지리 이야기가 이 책에 들어 있다. 정석풍수연구학회에서 낸 《청와대! 새집 줄게 헌집 주오: 경복궁 복원을 위한 청와대 이전 제안서》도 있다.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 쓴 책은 여기에서 소개하기에는 너무 많다. 대통령 별로 청와대 경험자들이 책을 쓴 것이다. 청와대를 미국의 백악관과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도 있다.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대통령은 권한대행을 제외하면 이승만 대통령부터 문재인 대통령까지 총 12명이다. 역대 대통령을 여러 각도에서 비교한 책들도 많다. 강준식의 《대통령 이야기》, 김병문의 《그들이 한국의 대통령이다》, 김호진의 《한국의 대통령과 리더십》, 김충남의 《대통령과 국가경영》, 김동호의 《대통령 경제사》 등 다양하다. 각 대통령 별로 회고록, 자서전, 평전, 연설문집이 출간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세 명의 조선총독이 청와대에서 근무를 했다고 앞에서 언급했으니 총독과 관련된 책을 한 권 소개하고 싶다. 소설가 최인훈이 상상력을 고도로 발휘해 조선총독이 한반도를 다시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당찬 포부를 라디오 목소리로 이렇게 밝힌다.
“충용한 제국 신민 여러분. 제국이 재기하여 반도에 다시 영광을 누릴 그날을 기다리면서 은인자중 맡은 바 고난의 항쟁을 이어가고 있는 모든 제국 군인과 경찰과 밀정과 낭인 여러분……”
조선총독이 제발 다시 등장하지 않기를 애타게 바란다.
<참고문헌>
《(이제는 모두의 장소) 처음 만나는 청와대》, 안충기 지음, 위즈덤하우스, 2022년.
《(이제는 사료로 보는) 청와대의 모든 것: 청와대 안 건축과 그림과 문화의 아름다움에 빠지다》, 백승렬 글.사진, 아라크네, 2022년.
《청와대, 파란기와집 역사 이야기》, 서울역사편찬원 지음, 서울역사편찬원, 2023년.
《청와대야 소풍 가자》, 권영록, 조오영, 정명규 지음, 좋은땅, 2022년.
《청와대의 나무들》, 박성진 지음, 눌와, 2022년.
《(나랏일을 돌보며 국민을 섬기는 곳》 청와대(개정2판)》, 백승렬 글.사진, 송선옥 그림, 주니어김영사, 2019년.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유산》, 대통령경호실 편저자, 대통령경호실, 2007년.
《청와대 vs 백악관》, 박찬수 지음, 개마고원, 2009년.
《청와대! 새집 줄게 헌집 주오: 경복궁 복원을 위한 청와대 이전 제안서》, 정석풍수연구학회 지음, 조남선 글, 청어람M&B, 2021년.
《청와대 풍수논쟁》, 최세창 지음, 돋을새김, 2007년.
《청와대는 묘한 곳이다》, 김제이 지음, 삶과꿈, 2002년.
《(우리시대의 궁궐) 청와대》, 백승렬 글.사진, 디오네, 2006년.
《정치, 이렇게 굴러갑니다: 청와대, 총리실, 국회는 무슨 일을 하는가》, 손은혜 지음, 원더박스, 2021년.
《청와대 청기와의 깊은 뜻을 아느뇨》, 강현진 지음, 삶과꿈, 1997년.
《청와대는 묘한 곳이다》, 김제이 지음, 삶과꿈, 2002년.
《권력이 탐한 공간: 청와대 광화문 용산》, 한경사, 2022년
《총독의 소리(개정판)》, 최인훈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9년.
《대통령 이야기》, 강준식 지음, 예스위캔, 2011년.
《그들이 한국의 대통령이다》, 김병문 지음, 북코리아, 2012년.
《한국의 대통령과 리더십(개정증보판 2판)》, 김호진 지음, 청림출판, 2010년.
《대통령과 국가경영》, 김충남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부, 2011년.
《대통령 경제사(개정증보판)》, 김동호 지음, 하다, 2019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