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윤희 (책문화네트워크 대표, 문화평론가)
2025년 8월 20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Frankfurter Buchmesse) 조직위원회는 올해의 이슈 드리븐 프로그램인 ‘Frankfurt Calling 2025 – Perspectives on Culture and Politics’를 공식 발표했다.
제77회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오는 10월 15일부터 19일까지 열리며, 이번 프로그램은 출판 산업 교역의 장을 넘어 문화와 정치가 만나는 국제적 공론의 장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조직위원회는 보도자료에서 오늘날 세계가 사회적 분열, 민주주의의 위기, 인권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압박, 인공지능을 비롯한 새로운 기술적 도전에 직면해 있음을 지적하며, 문학과 출판이 이러한 시대적 도전에 응답해야 한다고 밝혔다.
프랑크푸르트도서전 조직위원회가 제시한 핵심 의제는 다섯 가지다.
첫째, 문학과 위기 지역이다. 가자, 우크라이나, 동남아시아 등 분쟁과 갈등 지역에서 나온 문학을 조명하며, 이러한 문학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현실을 반영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둘째, 인권과 표현의 자유이다. 표현의 자유와 출판의 권리는 민주사회에서 반드시 보장돼야 할 가치이지만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검열과 억압이 존재한다.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억압 속 탐사 저널리즘, 문화적 표현의 보호, 반유대주의 대응 등이 논의된다.
셋째, 위기의 민주주의다. 권위주의와 포퓰리즘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 제도는 위기를 맞고 있으며, 도서전은 문화가 저항과 비판의 언어로서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는 방식에 주목한다.
넷째, 사회적 결속이다. 사회적 분열과 불신이 확대되는 현실에서 문학과 문화가 이해와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며, 대화와 토론을 통해 사회적 결속을 회복하는 방법이 제안된다.
다섯째, 신기술과 새로운 도전이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신기술은 인간의 노동과 일상, 사회 전반에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안겨주며, 출판과 문화 역시 이러한 전환에 대응해야 한다.
이번 행사에는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이 참여한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마리아 레사(Maria Ressa)와 이리나 셰르바코바(Prof. Dr. Irina Scherbakowa), 전 NATO 사무총장 옌스 스톨텐베르그(Jens Stoltenberg), 독일 법무부 장관 슈테파니 후비히(Dr. Stefanie Hubig), 작가 토머 도탄-드레이푸스(Tomer Dotan-Dreyfus), 미투 사니알(Mithu Sanyal), 테아 도른(Thea Dorn), 요아나 오스만(Joana Osman), 알레나 자바린(Alena Jabarine), 조야 미야리(Zoya Miyari), 터키 출신 작가 에게 듄다르(Ege Dündar), 카롤린 발(Caroline Wahl) 등이 이름을 올렸다.
또한 언론인 하지자 하루나-엘커(Hadija Haruna-Oelker), 델핀 미누아(Delphine Minoui), 로버트 트래퍼드(Robert Trafford), 다비드 슈라벤(David Schraven), 위르겐 카우베(Jürgen Kaube), 다니엘 마르웨키(Daniel Marwecki), 사라 레비(Sarah Levy) 등이 참여해 표현의 자유와 저널리즘의 역할을 논의한다.
팔레스타인의 서점 운영자 마흐무드 무나(Mahmoud Muna)와 우크라이나 독립 서점 운영자 올렉시이 에린착(Oleksii Erinchak)은 갈등 지역에서 책이 수행하는 사회적 의미를 전하고, 중동 전문가 매튜 텔러(Matthew Teller)와 쿠바 망명 시인 아리엘 마세오 텔레즈(Ariel Maceo Tellez)가 국제적 시각을 보탠다.
학계와 전문 영역에서도 경제사학자 애덤 투즈(Prof. Dr. Adam Tooze), 문화과학자 겸 래퍼 레이한 샤힌(Dr. Reyhan Şahin), 안네 프랑크 교육센터 소장 메론 멘델(Prof. Dr. Meron Mendel), 칼 슐뢰겔(Karl Schlögel), 에카르트 폰 히르슈하우젠(Dr. Eckart von Hirschhausen), 사바-누르 치마(Saba-Nur Cheema), 요하네스 에버트(Johannes Ebert), 셰리프 리즈칼라흐(Sherif Rizkallah), 알라딘 엘-마팔라니(Aladin El-Mafaalani) 등 다양한 인사들이 연단에 오를 예정이다.
정치, 언론, 학계, 문학, 문화 활동가가 한자리에 모여 시각을 교차시킨다는 점에서 ‘Frankfurt Calling 2025’는 국제적 공론의 다층적 구조를 보여준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쿠텐베르트가 금속활자를 발명하게 되면서 독일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벨기에 등 유럽 국가들의 서적상들이 프랑크푸르트로 모이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9년 9월 17일 제 1회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파울교회(Paulskirche)에서 개최하게 된 이후 세계적인 도서전으로 성장하게 됐다.
참고로 파울교회가 갖는 의미는 도서전이 단순히 책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출판활동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책문화의 담론을 공유하고 확산하는 역할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파울교회는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 있는 역사적인 건축물이다. 독일에서 최초 자유선거로 구성된 의회인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회의 장소로 활용된 독일 정치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곳이다. 이곳 파울교회에서 매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조직위원회는 '평화상'을 수여한다.
이처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전통적으로 세계 출판 산업의 최대 전시장이자 교역의 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번 프로그램은 그것을 넘어 출판과 문학의 사회적 책무를 다시 환기한다.
위기 지역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문학,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저널리즘,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응하는 문화적 실천, 인공지능 시대의 성찰 등은 모두 출판이 공공 영역에서 감당해야 할 책무를 드러낸다. 이는 출판이 여전히 사회적 기억을 기록하고 자유를 옹호하며 미래를 성찰하는 핵심 매체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번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이 제시한 프로그램은 한국 출판계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한국 사회 또한 정치적 갈등, 세대 간 분열, 표현의 자유, 기술 발전이라는 복합적 과제에 직면해 있지만 국내 도서전과 문학 축제는 여전히 산업 중심에 머물러 있다.
서울국제도서전과 같은 국내 행사도 신간 등 도서 홍보와 판매 중심의 전시를 넘어 민주주의, 인권, 기후위기, 기술 변화와 같은 사회적 의제를 전면에 내세운 국제 세션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국제'도서전에 걸맞게 산업적 전시를 넘어 사회와 소통하는 지식의 공론장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전환이 필수적이다.
이와 함께 공공도서관 역시 시민들의 토론의 장으로 기능해야 하며, 출판사와 협력해 위기 지역 문학이나 표현의 자유 관련 도서를 기획하고 공개 토론을 활성화할 수 있다.
정책적 차원에서도 사회적 담론을 촉진하는 출판 기획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 절실하다. 사회 의제를 다루는 기획 출판 지원, 위기 지역 저자와의 국제 교류 지원, 출판을 통한 민주주의·시민성 강화 프로젝트 지원 등이 구체적 과제가 될 수 있다.
‘Frankfurt Calling 2025’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이 단순한 산업 교역의 장을 넘어 문화와 정치의 접점을 탐색하는 국제적 플랫폼으로 확장했음을 보여준다.
한국 출판계도 도서전·도서관·정책 차원에서 출판의 공적 가치를 강화할 때 비로소 세계적 담론의 당당한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